역사이야기

日王, 한국말로 신라神 모신다

늠내 화랑 2006. 4. 15. 20:02

▼ 경상도 말로 제사 지내는 천황가 ▼


 



 불교가 전파되기 이전 고대 왜왕실에서 신라 신도 제사를 지켜왔다는 것은 역사 기록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6세기경의 고대 역사기록인 ‘구사기(舊事記)’의 ‘천손본기(天孫本紀)’에는 신라 신도 제사를 담당해온 모노노베노(物部) 가문에 대한 상세한 계보가 밝혀져 있다.



그런데 이 제사 때는 놀랍다고나 할까, 아니 당연하다고 할까, 경상도 말인‘신라어’로 강신(降神)의 축문을 외운다. 긴 축문 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경상도 말은 다음과 같다. 원문은 물론 한자어인데, ‘아지매 여신(女神)’이 신라로부터 천황가 제사 자리에 오라고 부르는 초혼(招魂)이다.


 



아지매 오게, 오, 오, 오, 오, 오게

阿知女, 於介, 於, 於, 於, 於, 於介


 



일본말로 이 축문의 한자어들을 읽을 때에는 경상도 말이 그대로 나타난다.


이 축문의 한자 표기는‘이두(향찰)’식인 것이다. 이를 일본에서는‘만요우카나’식이라고 부른다. 위의 이두식 축문을 우리나라 말로 읽는다면 ‘아지녀 어개, 어, 어, 어, 어, 어개’로 전혀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말이 된다.



이렇게 천황가의 축문이 경상도 말로 읽힌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천황가의 신도 뿌리가 경상도 말을 사용하는 신라 신도와 맞닿아 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축문에 나오는 ‘아지매(阿知女)’란 무슨 뜻인가. 경상도 방언으로 ‘아주머니’라는 말인데 지금도 경상도 사람들은 아주머니를 아지매라고 표현한다. 오늘날 부인에 대한 존칭어인‘아주머니(아지매)’는 고대 신라에서 신분이 고귀한 여성, 신성한 여성, 즉 ‘여신’을 존칭하던 대명사였다고 본다.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또 하나의 증거가 있다. 일본 고대사에서는 ‘여신’이나 귀족 출신의 젊은 여성을 가리키는 말로 ‘오미나(をみな)’라는 여성대명사가 사용됐다.


일본 고대신화에서 태초의 개국신(開國神)인 ‘이자나기노미코트’가 최초의 처녀 여신 ‘이자나미노미코토’에게 ‘여자’라는 말을 쓸 때 ‘오미나’라고 부른 것이 그 최초다. 이 ‘오미나’는 본래 우리나라의 옛말인‘에미나’에서 나온 말이다.


 



고대 한국에서는‘여자’를‘에미나’로 불렀다. 그 흔적은 함경도며 강원도, 경상도 등 동해권 지방에서 아직도 통용되는‘에미나’라는 말에서도 잘 살펴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오늘날 일반 명사로서 ‘온나(おんな, 女)’라는 말을 쓰고 있다. 바로 이 ‘온나’의 어원이 귀족 여성을 칭하는 ‘오미나’라는 것은 일찍부터 저명한 일본어 학자들도 지적하고 있었다.


“오미나(をみな, 女)는 온나(おんな)이며 또한 매(め)라고도 부른다. 여신(女神)을 ‘오미나가미(をみながみ)’로도 부른다.”(金澤庄三郞, ‘廣辭林’, 1925)


경상도 방언에서는 또한 ‘어머니’를 ‘어매’라고 하는데, 여기서 매(女)는 ‘아지매’의 매와 통한다. 또한 이 매에서 뒷날 어미 모(母) 자를 이루는‘모’의 발음도 나왔다고 본다.

▼ 신라신(園神)과 백제신(韓神) ▼


 




사진 1 현재의 일본 천황가에서도 신라신인 ‘소노카미(園神)’와 백제신인 ‘카라카미(韓神)’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물론 일본 천황가 내부 사항은 일체 공개되지 않고 있어서, 일본의 전문학자들도 근래에는 천황가 제사에 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고대부터 일본의 천황들이 왕궁에서 제사를 모신 최고의 신은 신라신인 원신(園神, そのかみ)과 백제신인 한신(韓神, からかみ)이었다는 점이다. 그 사실은 일본 고대 천황가 문서에 상세하게 밝혀져 있다.


 



‘엥기시키(延喜式, 연희식)’라는 이 천황가 문서는 서기 905년 다이고천황(897∼930년 재위)의 명에 따라 집필이 시작된 이후 927년에 완성되었다. 장장 23년에 걸쳐 완성된 이 문서는 일본 천황가의 모든 왕실제도와 규범이 50권 분량으로 편찬한 중요한 역사 기록이다.


왕명에 의해서 이것을 작성한 주체는 후지와라노 토키히라(871∼909년) 대신과 그의 아우 후지와라노 타다히라(880∼949년) 대신 형제다. 왕실 귀족가문의 두 형제는 천황의 최측근으로서, 좌대신과 태정대신 등 최고 장관직에 있었던 백제계 인물들이다.


이 ‘연희식’의 제1권 신기(神祇)편에는 서두에 천황궁에서 모시는 사당의 3신이 나온다. 가장 앞에는 신라신을 모신 ‘원신사(園神社, 소노카미노야시로)’가 나오고 두번째로 ‘한신사(韓神社, 카라카미노야시로)’가 등장한다.(사진 1 참조)


또한 이 기록에 잇대어서 살펴보면, 천황들이 모셔온 왕실의 신은 모두 285신에 이른다. 그 순서도 맨 앞에 신라계 신사인 원신사에서 모시는 한 분의 신이 나오고, 뒤이어 백제계 신사인 한신사에서 모시는 두 분의 신이 등장한다. 그 다음으로 신라계의 여러 신들을 모신 신사가 줄을 잇는다. ‘카모신사(賀茂神社)’ ‘마쓰오대사(松尾大社)’ ‘이나리대사(稻荷大社)’ 등이 그것이다. 다음으로는 백제신 네 분을 모신 ‘히라노신사(平野神社)’ 등도 등장한다.


이것은 ‘연희식’ 편찬 당시 천황들이 백제 계열의 왕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신들을 모신 신사와 백제신들을 모신 신사들의 서열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또 천황가 신화(神話)의 신들이 대부분 신라신이었으며, 일본 고대사(‘고사기’‘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신들도 신라신이 주도적이었다는 점과 관계가 깊다.


 



그런데 일본의 신통보는 신라신과 백제신의 계보를 한 조상신의 후손신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712년 일본 역사상 최초로 편찬된 ‘고사기(古事記)’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대년신(大年神)이 신활수비신의 딸인 이노비매와 혼인하여 낳은 자식은 대국어혼신(大國御魂神), 다음은 한신(韓神), 다음은 증부리신(曾富理神), 다음은 백일신(白日神), 다음은 성신(聖神)이다.”


‘대년신’이란 신라신인 ‘소잔오존(素盞烏尊,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아들신이다. 이 대년신에게서 태어난 다섯 아들 신들은 당연히 신라계일 터인데, 제2자인 한신(韓神)만은 백제신이다. 어째서 신라신의 자식들 중에 백제신이 들어 있는지는 앞으로의 연구 과제다. 단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둘 것이 있다. 일본 최초의 역사책 ‘고사기’를 쓴 안만려(安萬侶, 야스마로, 723년 사망)는 조정에서 내무장관격인 ‘민부경’으로서, 백제 계열의 조신이었다.


 



아무튼 한신은 일본 천황가 제사에 신라신과 함께 모시는 백제신이거니와, ‘증부리신’은 신라신 원신(園神)을 가리키는 또다른 표현이다.‘증부리신’은 일본어로 ‘소호리’의 신, 즉 ‘서울’의 신이다. 증부리신으로도 불리는 원신이 신라신이라는 것은 일본의 권위 있는 사학자들의 통설이며, 쿄우토대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1927∼) 교수는 다음과 같이 논술했다.


“역사책 ‘고사기’에는 대년신과 이노비매 사이에서 태어난 5신들 중에서, 한신과 증부리신 등 조선의 신들이 등장하고 있다. 증부리신이라는 것은 소시머리(ソシモリ, 牛頭)와 연관이 있는, 신라(新羅) 연고를 가진 신의 이름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한신(韓神)은 원신(園神)과 나란히 조정의 왕궁 안에 모신 신으로 존숭되고 있고, 궁정의 진혼제 전야에 제사드리며, 그곳에서 ‘카구라(神樂)’도 연주하게 된다. 그러기에 9세기 중엽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카구라우타(神樂歌, 천황가 제사의식 때 축문 악보에 실린 제사 노래)’의 가사에는‘나 한신은 한(韓)을 뫼셔오노라’고 노래부르는 것이다.”(‘日本神話’, 1970)

한국말로 하는 초혼사


 




사진 2 지금도 일본 천황은 토우쿄우의 천황궁 안에서 ‘신상제(新嘗祭, 니이나메사이)’를 지낸다. 해마다 11월23일 거행되는 천신 제사다. 역대 일본 천황들은 대신들과 신관을 거느리고 직접 신상제 제사를 지내왔다. 이때 어김없이 신라의 아지매(阿知女) 여신을 초혼하며, “아지매, 오게, 오, 오, 오, 오, 오게”의 축문을 연거푸 외우는 것이다. 이 축문이 담긴 것을 통틀어 신악가(神樂歌)라고 일컫는다.


제사 첫머리에 신라신과 백제신을 모신 신전 앞에서 장작불을 피우고 ‘아지매’를 초혼하는 의식인‘아지매노와자(阿知女法)’로 의식을 치르는 것을 가리켜 천황가 제사의 ‘신악(神樂, 카구라)’이라고 일컫는다. 이때 2명의 대신이 신전 좌우에 서서 엄숙하게 ‘아지매’여신의 초혼사 축문을 차례차례 외친다.


 



(본방) 아지매 오, 오, 오, 오.

(말방) 오게

아지매 오, 오, 오, 오.

(본방) 오게

오, 오, 오, 오,


(말방) 오

오게



이어서 신물(新物) 잡기 제사가 이어지면서 신악의 본축문인 한신(韓神)을 외우고, 악기를 연주하고, 신관이 근엄하게 춤을 춘다. 한신의 축문은 다음과 같다.


 



“미시마 무명 어깨에 걸치고, 나 한신도 한(韓)을 뫼셔오노라. 한(韓)을 뫼셔, 한(韓)을 뫼셔 오노라.


팔엽반을랑 손에다 쥐어잡고, 나 한신도 한을 뫼셔오노라. 한을 뫼셔, 한을 뫼셔 오노라.

(본방) 오게 아지매 오, 오, 오, 오

(말방) 오게.”


 



여기서 한신(韓神)은 당연히 백제신이며, 한(韓)은 한반도의 신을 뜻한다. 또 이 경우 한은 여신인 아지매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단군의 어머니인 웅녀신(熊女神)을 그 옛날 신라어(경상도 말)로 ‘아지매’로 호칭한 게 아닌가 싶다.


이는 ‘일본서기’의 스이닝(垂仁, 3세기경)천황 당시의 역사 기사에서 “신라왕자 천일창(天日槍)이 곰신단(熊神籬, 쿠마노 히모로기)을 가지고 신라로부터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하는 기사에서 유추해볼 수 있는데, 에도시대(1607∼1867년)의 저명한 고증학자 토우테이칸(藤貞幹, 1732∼1797년)은 곰신단에 대해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곰신단(쿠마노 히모로기)의 히모로기(ひもろぎ)는 신라어다.”(‘衝口發’)


즉 ‘히모로기’는 제사 모시는 신단이라는 신라어(경상도 말)라고 한다. 오늘날 이 말은 그 자취를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신라의 천일창 왕자가 ‘곰의 신단’을 모시고, 왜왕실로 건너왔다고 하는 것은, 당시 스이닝천황에게 단군의 어머니신인 웅녀신에 대한 제사를 모시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본다. 그 이유는 스이닝천황과 그의 부왕인 스진(崇信, 2세기경)천황이 신라인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저서 ‘일본문화사’(서문당, 1999)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스진천황은 재위 당시 신라신인 대국주신(大國主神, 大物主神으로도 부름)을 나라(奈良) 땅 미와산(三輪山)에 신당을 차리고 제사지냈던 것이 밝혀졌다. 현재도 대국주신은 나라의 미와산 오오미와신사(大神神社)에서 모시고 있다는 것을 밝혀 둔다.(사진 2 참조)


그렇다면 일본 천황가 제사 축문의 ‘한신’과 ‘한’에 대해서, 일본의 전문학자들은 어떻게 풀이하고 있을까. 우스다 징고로우(臼田甚五郞) 교수는 신악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진솔하게 지적하고 있다.


“한(韓)을 뫼셔온다는 제사 양식은 한국식(韓風)이다. 신 내리기의 신물(神物)잡기에서 연상되는 것은, 신성한 무녀(巫女, 일반적인 무당이 아니라 고대 왕실의 왕녀 등을 가리킴-필자 주)가 신(神)을 향응하는 이미지다. 이 신악가의 위치에서 고찰한다면, 신의 잔치도 신주(神酒)를 권하는 단계에 들어가면, 터주신(地主神)인 한신이 새로이 찾아오는 신인 천황(天皇) 및 천황가(天皇家)에 대해서 귀순 접대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상정된다.”(‘神樂歌’, 1992)


 



우스다 징고로우 교수의 지적을 부연해 설명하면 이렇다. 일본 천황가에서 모시고 있는 한신은 이미 일본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터주신이다. 이 터주신이 한반도에서 건너오는 신인 천황과 천황의 가족들을 지금의 천황가에다 기꺼이 모시는 것이 제사의 의미라는 것이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고대일본은 한반도의 정복자들이 건너와서 한반도의 조상신에게 제사지내며 살고 있는 곳이며, 또한 한반도에 있는 천황족들의 조상신들까지 초혼해서 기꺼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 스진천황과 한일동족설 ▼


 



일본의 고대왕실은 말할 것도 없고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천황가의 조상신 제사는 철저하게 지켜져 내려오고 있다. 고대로부터 일본왕실의 제1차 주권(主權)은 제사권(祭司權)이고, 제2차 주권은 정사권(政司權)이다. 앞에서 이미 간략하게 밝혔거니와, 스진천황은 신라신 대국주신을 제사지내게 됨으로써, 신도 국가의 기틀을 세우고 비로소 반석 같은 정사(支配)의 터전을 이루었다. 그런 견지에서, 오오사카교육대 사학과의 토리고에 켄사브로우(鳥越憲三郞) 교수가 다음처럼 주장한 것은 공감할 만하다.


“지금까지의 역사학에서 빠져 있었던 큰 문제는 씨족이나 부족의 수호신, 즉 그들이 받들어 제사지내는 신사(神社)의 제신(祭神)과 그것에 관련되는 종교 관념이다. 이는 고대사에서뿐만이 아니라, 중세사·근세사에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특히 고대에서는 그 사회를 움직이는 인자(因子)가 바로 ‘종교관념’이었다. 그 종교관념을 내버려두고 고대사회를 규명하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神神の中の古代豪族’, 1974)


이와 같은 주장을 실증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앞에서 살펴본 신도와 불교의 종교전쟁이다. 그렇다면 백제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인 2세기경 일본에 유입된 신라신도는 어떻게 종교관념으로 착근되었을까.


 



여기에는 신라 출신으로 왜의 지배자가 된 스진천황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스진천황에 대해 토우쿄우대 에카미 나미오(江上波夫, 1906∼) 교수는“스진천황은 고구려계 기마민족의 후손으로 남하하여 가야지방에 살고 있던 사람으로, 일본 최초의 정복왕이다”(‘기마민족국가론’, 1948)고 내세운 바 있다. 일본 패전 직후인 1948년 5월에 발표한 그의 주장은 소위 ‘임나일본부설’을 그 배후에 깔고 있는 학설이다.


필자는 스진천황이 고구려계 가야 출신의 일본 정복왕이 아닌, 신라 출신의 일본 정복왕으로 보고 있다. 스진천황은 신라신인 대국주신(대물주신)을 나라(柰良) 땅 미와산에 모시고 일본고대 역사상 최초로 제사권을 발동한 사제왕(司祭王)이기도 하다. 필자는 또 신라인 집단인 이즈모(出雲)족 출신의 스진천황이 처음으로 그가 다스리던 국가를 한국말로 ‘나라(奈良)’라고 하여 이두식 표기를 했던 것으로 추찰한다.


이는 필자만의 주장은 아니다. 이미 1900년에 역사지리학자인 요시다 토우고(吉田東伍, 1864∼1918년) 박사는 “나라(奈良)는 이 고장을 점거하고 지배하던 이즈모족이 ‘국가’라는 뜻으로 지은 명칭”(‘大日本地名辭書’, 1900)이라고 밝혔다. 그는 ‘나라’라는 한글까지 사전에다 직접 쓰면서, 한국어의 발자취를 입증한 바 있다. 또한 일본 고어학자인 마쓰오카 시즈오(松罔靜雄) 교수도 ‘일본고어사전’(日本古語大辭典, 1937)에서 역시 똑같은 사실을 밝혔다.

날조된 9명의 천황들


 



그런데 여기서 한마디 더 짚고 넘어갈 사실이 있다. ‘일본서기’등 고대 역사책에는 초대 왕부터 제9대왕까지의 조작된 왕들을 써넣고 있고, 제10대 왕에 신라인 스진천황을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니까 무려 9명의 왕들을 날조해 놓은 것이다.


일본의 저명한 학자들에 의해서 그와 같이 허위 조작된 ‘궐사천황’들은 일찍부터 비판받아왔다. 그러나 아직도 국수적인 우익사관 신봉자들은 날조된 9명의 왕을 내세우고 있다. 일본 역사에서의 날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근래의 각종 역사교과서 왜곡뿐만이 아니라 구석기 유물마저 날조함으로써 세계적인 망신을 당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본인의 날조 역사 이면에는 한국에 대한 콤플렉스가 작용하고 있다. 일본이 한국보다 더 오랜 역사시대를 누렸다는 거짓을 꾸며내느라, 일본 역사를 한국보다 600년씩이나 위로 끌어올려 놓았던 것이며, 사실(史實)에 전혀 없는 9명의 왕들까지 날조하기에 이른 것이다.


 



참고로 왜왕실에 ‘천황호(天皇號)’가 등장한 것은 668년경이다. 712년에 최초의 일본 역사책 ‘고사기’가 등장할 때에 고대의 모든 왜왕의 왕호도 천황으로 일제히 통일시켜 표기한 것임도 밝혀둔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실질적으로 일본의 제1대 천황인 스진천황은 제사권과 정사권을 확립하는 한편, 일본의 선주민족을 신라의 산업문화권에 안주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즉 선진 신라의 벼농사와 농기구·칼 등을 제작하는 철기산업, 스에키(須惠器, 쇠처럼 단단한 그릇이라는 쇠그릇으로 ‘쇠기’라는 고대 신라어에서 생겨난 명칭-필자 주)라고 하여 흙을 구워서 만드는 도기산업, 베틀에 의한 직조산업 등 선진문화산업은 당시 미개한 일본 선주민들로 하여금 이즈모민족의 신도(神道)신앙에 만족스럽게 순응토록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런 흔적들은 일본 옛 문헌들에서도 곧잘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대장간’을 한자어로 ‘카라카누치(韓鍛治)’라고 하거나, 땅을 파는‘삽’을 한국 삽이라는 의미의‘카라사비(韓)’로 표현하거나 재기를 ‘카라스키(韓鋤)’로 부르는 데서 고대 한국의 문물이 건너갔음을 알 수 있다.


 








洪潤基 < 문학박사·한일역사문학연구회장 >
 발행일: 2002 년 02 월 01 일 (통권 509 호)/신동아


 


(전체글은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rpwhrtks&folder=27&list_id=4986711)



출처 : 맑은바람 증산도
작성자 : 조민애
작성일 : 2006.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