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환단고기 진위 논쟁의 주요 내용1

늠내 화랑 2012. 11. 15. 21:45

작성자 : 이한근

참고자료 : 상생출판 환단고기 역주본, P116

논점 : 연개소문 조부의 이름이 "자유子遊'라는 기록 



위서론의 주장 :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1911년에 편찬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없다. 예를 들어 1923년 중국 낙양에서 발굴된 천남생 묘지를 통해서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자유子遊'의 이름이 최초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그 '자유'라는 이름이 [환단고기]에 있다는 것은 모순이다. 따라서 [환단고기]는 1923년 이후에 쓰인 기록이다. 



위서론에 대한 반론 : 


고려 때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백제 무령왕의 휘가 사마이며, 서기 523(계묘년) 5월에 붕했다"라는 기록의 있는데, 1971년 공주에서 발굴된 무령왕릉의 지석誌石에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내용과 동일한 기록이 발견되었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는 연개소문 할아버지의 이름이 '자유子遊', 증조부의 이름이 '광廣' 이라는 것도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태백일사] 외에는 어느 사료에도 없는 내용이다.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이름이 '자유'라는 사실은 1923년 발굴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 묘비에서 확인되었다. 

연개소문의 할아버지 이름이 '자유'라는 사실은 [환단고기]의 내용이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가 된다. 




논점 : 고조선 국가의 건립 시기



위서론의 주장 : 


[환단고기]는 고조선이 BCE 2333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나 고대국가의 출현은 청동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BCE 10세기 이전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환단고기] 기록을 믿을수 없다. 



위서론에 대한 반론 : 


동북아 지역에서는 BCE 35세기 이전에 이미 고대 문명국가가 성립되었다. 

요령성 홍산문화의 중심지인 우하량에서 발굴해낸 유물, 유적이 이를 입증한다. 

삼원구조로 된 대형 원형제단과 신전, 많은 적성총은 상당한 정도의 권력이 존재했음을 드러내주며 이러한 권력의 존재는 국가의 존재를 전제로 해야 이해가 가능하다. 

홍산문화의 유적, 유물이 발견된 요서 지역은 중국인의 영토가 아니었다. 

홍산문화 유적, 유물은 한민족의 뿌리 역사의 진실을 드러내 주는 귀중하고 놀라운 증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한반도에서도 청동기 유적인 강릉 교동 1호 거주지는 BCE 1878년경의 것으로 확인되었고, BCE 25세기 이전의 것으로 검증된 평양시 상원군 용곡리 고인돌 무덤에서는 비파형 창끝과 청동단추가 출토되었다. 

고조선 건국을 BCE 10세기경으로 한정하는 주장은 최근의 고고학 발굴 현황을 받아들이지 않는 지적 불성실과 오만의 소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