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고려국을 아시나요?
대고려국은 1917년 우리 역사 현장인 만주를 중심으로 하여 한반도 전역과 연해주를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계획이었다. 이 당시 만주는 무주공산이었고 조선족이 가장 큰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어 국가를 세우는데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청이나 일본도 자국의 각자 이익에 의거 이를 승낙한 상태였다. 올해가 100주년 되는 해인데 그 중심에 정안립이 있었다.
정안립(鄭安立)[1873~1948]은 1888년(고종 25)년에 16세로 사마시 생원과에 합격한 후 법관양성소(1895)·한어학교(漢語學校)[1897]를 졸업하였다. 혜민원 주사[1902], 법관양성소 교관[1905], 보성전문학교 교감[1905], 신민회(新民會) 회원[1907], 보성전문학교 교장[3대, 1909. 2]을 지냈고, 청주에 보성학교를 설립[1909. 5. 10]하는 등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에는 양성군수(陽城郡守)를 역임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정태은(鄭泰殷)·김만배(金萬培)[金益濟로 개명, 金萬熙의 동생]·이증수(李曾秀) 등 여러 동지들과 우국단(憂國團)을 조직하여 항일독립운동의 방략을 모색하였다. 국내에서의 활동이 여의치 않아 정태은·김만배 등과 미국으로 건너가려고 하였으나, 정안립만이 검역에서 탈락하여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1910년 만주 길림성으로 망명하여 이름을 정안립이라 개명하고[1911], 길림성 간도 일대에서 유동열(柳東說) 등과 항일독립운동 자치조직인 동삼성한족생계회(東三省韓族生計會)[1917]를 설립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3월에는 여준(呂準)·유동열·신팔균(申八均)·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서일(徐一) 등 39명의 이름으로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1919년 4월에는 여준 등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독립안’을 제출하기 위한 대계획을 수립 하였다.
그는 또 동삼성 순열사인 장작림(張作霖)을 일제가 암살할 것이라는 정보를 알고 급히 전보로 알려 장작림의 위기를 모면케 하였다. 만주사변(滿洲事變)[1931. 9. 18.] 후 상해에서 동아국제연맹(東亞國際聯盟)[1933~1940]을 조직하여 일본·중국 등을 무대로 활동하던 중 일제 고등계 형사들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어 중부서에 연금되었다. 광복 후 1946년 남북통일기성회 회장을 맡아 통일운동을 하다가 별세하였다.
영토론에 민족사적 생활영토론이 있는데 지금도 조선족이 살고 있는 이 지역은 우리의 문화가 그대로 남아있다. 또한 잠재적 영토관은 미래를 열어가는 중요한 요소로서 우리 국민 모두가 만주일대를 대상으로 하는 대고려국의 판도를 우리의 영토로 인식 하여야 한다.
각영당에서
청도 장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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