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열전

재세이화(在世理化)

늠내 화랑 2011. 4. 15. 23:30

<출처 : 떼르또엔 블로그>

 

 

재세이화(在世理化) : 있을재, 대세, 다스릴이, 될화
 : 儒佛(유불)의 韓國化(한국화)와 著述活動(저술활동), 세상을 이치로 바로잡기

 

 여기서는 원효대사의 재세이화적인 면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재세이화란 대자연의 불규칙한 호흡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고, 나아가 대자연의 불규칙한 호흡을 활용하여 하나님이 땅 위에 쌓아 두신 많은 것을 거두어 들여 물자를 부족함 없이 하는 것으로써, 산업을 일으키며 경제를 부흥하는 것들을 말한다. 哲人(철인)은 이로써 불규칙한 대자연의 변화로 인해 피해 받는 사람이 없도록 하며 윤택하고 풍요로운 사회를 건설한다. 따라서 재세이화란 결국 氣(기)를 理(리)로 다스리는 작업으로, 혼돈의 인간세계를 질서의 세계로 만드는 것이다.

 

 필자는 원효대사의 재세이화적인 행위는 한국의 양대사상이었던 유학과 불교, 두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원효대사는 스스로 佛敎(불교)를 韓國化(한국화)하여 제세이화, 즉 세상을 이치로 다스리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일생동안 수많은 저술과 연구를 통하여 불교의 이치를 낱낱이 밝혔다.

설화에서는 이를 이렇게 적고 있다.

 
 일찌기 분황사에 머물러 있으면서 華嚴經疏(화엄경소)를 저술했는데 제40권 廻向品(회향품)에 이르러 끝맺고는 절필하였다. 또 언젠가는 公事(공사)로 인해서 몸을 百松(백송)으로 나눈 적이 있었다. 그래서 모두들 位階(위계)의 初地(초지)라고 일렀다. 원효대사는 또한 해룡의 권유에 의하여 노상에서 조서를 받고 「金剛三昧經疏(금강삼매경소)」를 저술하였다. 그 저술을 할 때 筆硯(필연)을 소의 두 뿔 위에 놓아 두고 했다고 해서 그것을 角乘(각승)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각승이란 또한 本覺(본각)과 始覺(시각)의 오묘한 뜻이 숨어 있는 것이다. 大安(대안)법사가 와서 종이를 붙였으니, 역시 의미를 알고 둘이서 주고 받은 것이다.

 
 원효대사의 학문 활동은 젊은 시절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계속되었다. 그의 나이 32세 되던 648년에 번역된 「유가론」이 그의 저술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대부분 저술은 30대 이후에 씌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초기 저술로 생각되는 「대승기신론별기」에도 649년에 번역된 「십대승론」이 인용되어 있다. 이로써 이 책은 33세 이후의 어느 때에 씌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대해도경종요」는 47세 이후의 저술이고, 「판비량론」은 59세 때의 저작이다. 그리고 「화엄종요」와 「금강삼매경론」은 60대 만년에 씌어진 것 같다. 이처럼 전 생애에 걸친 끝없는 노력에 대해 의천은 ‘경전마다 주석이 있고, 통하지 않는 논이 없다’고 평했다.

 원효대사는 지금도 읽히고 있는 「금강삼매경론」을 비롯하여, 101종 206권에 달하는 상당한 분량의 저술을 하였다. 원효의 저술에 관하여는 70여부 90여권으로부터 100여부 240여권에 이르기까지 그 설이 다양하나, 적어도 80여종 이상의 저술을 했음은 틀림이 없다. 그는 우리 나라뿐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를 통틀어서 그 양과 질에 있어서 최고 수준의 저술가였다. 사실 한국불교사상 원효대사를 능가하는 저술가는 찾기 어렵다.

 신라의 義寂(의적)이 25부, 憬興(경흥)이 40여부, 太賢(태현)이 50여부, 百本疏主(백본소주)로 불리는 窺基(규기)의 경우도 50여부의 저술을 남겼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중국 및 일본에 전해져 높이 평가되고 많은 영향을 주었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십문화쟁론」은 번역되어 인도에까지 유포된 책이다. 또한 「금강삼매경론」은 신라를 비롯하여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도 찬양 받았던 저서이다.

 그러나 원효의 이런 교학은 공허한 이론을 위한 학문이 아니었다.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고 많은 사람들을 실천으로 이끌려는 구원론적인 관심으로부터 비롯된 이론이었다. 이런 점들은 「보살계본지범요기」를 쓰게 된 의도가 ‘천박한 짓은 버리고, 깊고 원대한 일을 완전하게 하며, 또한 사이비 행동일랑 버리고 진실한 것만을 따르고자 하는 자기 자신의 다짐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함에 있다’고 한 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원효의 학문적 관심은 자신의 문제, 그것도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문제로부터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학문적인 노력은 곧 하나의 등불을 밝히는 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했고, 그 등불이 두루 전해져 세상의 어둠을 밝힐 수 있기를 염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학문에는 현실적 인생체험이 풍부하게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그는 수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현학적이거나 훈고적이지는 않는 것은 이런 점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의 학문과 연구는 오직 재세이화를 위한 한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원효대사는 그의 아들 설총을 통하여 儒學(유학)을 韓國化(한국화)하였다.

세속으로 돌아온 원효대사는 먼저 그가 노래에서 약속한 대로 ‘하늘을 받칠 기둥’을 만들었다. 즉 요석공주로 통해 설총을 낳았던 것이다. 설총은 신라 十賢(십현)의 한 사람으로, 신라뿐만 아니라 이후 한국의 정치사회적인 사상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던 유학을 한국화한 큰 학자이다.

이 부분을 설화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공주는 과연 아이를 배더니 薛聰(설총)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명민하여 經書(경서)와 歷史書(역사서)에 두루 통달하였다. 그는 신라 十賢(십현) 중의 한 분이다. 우리말로써 중국과 外夷(외이)의 각 지방 풍속과 물건 이름 등에 통달하고 六經文學(육경문학)을 訓解(훈해)하였으므로,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經學(경학)을 공부하는 이들이 전수하여 끊이지 않는다.

  윗 글을 자세히 읽어보면, 우리 나라의 유학은 설총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즉 그는 중국과 주변국들의 지방 풍속과 물건 이름 등에 두루 통달하여 六經文學(육경문학)을 우리말로 訓解(훈해)한 최초의 학자로, 일연의 시대까지 이를 전수하여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설총이야말로 유학을 최초로 한국화시킨 학자라 하여 무방할 것이다.

 

 삼국시대 이래 조선조까지, 우리의 전 역사를 통하여 크게 보면 불교가 정신적인 측면의 한 기둥이었다면, 유학은 정치사회적인 제도상의 한 기둥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원효대사가 설총을 두고 ‘내 하늘 바칠 기둥을 다듬고자 하는데’라는 깊은 의미가 와닿을 것이다. 이는 바로 유학을 통한 재세이화라 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자신이 한국화한 불교가 아니라, 또다른 사상인 유학을 한국화함으로써 재세이화의 다른 한 축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의 안목이 범상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살펴본 대로, 그는 스스로 인도와 중국의 불교를 한국화하고, 나아가 아들 설총을 통하여서는 유학을 한국화하였다. 고래로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및 사상이 유학과 불교를 두 축으로 하여 내려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원효대사의 재세이화사업이 얼마나 크고도 넓은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