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구월산에 삼성사가 있는 이유

늠내 화랑 2013. 5. 2. 08:43

월산에 삼성사가 있는 이유


9
월의 또 다른 뜻

상제님께서는 도전 658장에서 애기장수 초립동이 일꾼은 구월산九月山에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 하루는 한 성도가 여쭈기를 예로부터 애기장수가 난다.’는 말이 있사온데 그 장수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하거늘 상제님께서 담배를 피우시다가 구월산!” 하시고는 아무 말씀이 없으시니라.(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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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9월은 술월戌月입니다.
우주변화의 원리의 최종 결론은 ()이 태극이라는 것입니다.
상제님의 이 말씀은 초립동이 일꾼은 진리의 최종 열매와 관련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대두목관과도 관련이 있음은 두말할 필요 없을 것입니다.

요컨대 진주도수의 주인공, 추수 지도자는 9월에 15수로 오시는 종도사님이십니다.
 

구월산에 삼성사가 있는 이유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에는 삼성조이신 환인, 환웅, 단군의 어진이 있는 삼성사가 있습니다. 환단고기에는 6세 달문단군 때에 지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수많은 핍박에도 살아남아서 신위를 모시는 곳으로 한민족 신교 문화의 얼과 숨결이 그대로 살아남아 있는 곳입니다.   

삼성사는 본래 구월산의 최고봉 대증산(大甑山)에 있었는데, 신라시대 패엽사가 창건되면서 거슬린다하여 패엽사 아래 소봉우리로 옮겨졌다가, 또다시 산기슭 소증산(小甑山)으로 옮겨진 것이 현재의 삼성당이라고 합니다. 지금 대증산에 그 터가 남아있지 않습니다.(아마 대증산에 있던 삼성사는 달문단군 때 창건되어, 너무 오래 되어 터가 남아있지 않은 듯) 소증산으로 옮겨진 것도 간도수가 아닐까요?

(참고글: 설자리를 잃어가는 구월산 삼성사의 가슴아픈 이야기)

삼성당 안에 모신 신위는 널빤지 위에 신위를 새긴 위판(位板) 형태입니다. 옛날에는 목상(木像)으로 모셔져 있었는데 태종 때 하륜(河崙)이 목상을 부셔버렸다고 합니다. 하륜이 제천행사는 중국황제만이 행하는 것이므로, 조선의 왕은 행할 수 없다는 모화사대주의 건의를 태종에게 올려, 전국의 목상을 다 없앴다고 합니다. 이런 삼성사가 일제시대도 극복하고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도 기적이 아닌가 합니다.

한민족의 뿌리 조상인 국조 환인, 환웅, 단군 삼성조를 잘 받들고 모시라는 것은 상제님의 뜻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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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초상화를 보면, 지금 우리나라가 남과 북으로 나누어지기 전 북쪽의 단절된 황해도 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미 해방 전에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때는 물론이고, 일본이 한국정신이라면 관련된 것을 모조리 빼앗아 소각하고 이를 갈았던 그 살벌했던 일제시대 때도 일제에 의해서 없어지지 않고 어떻게 살아 남아서, 이렇게 우리 천손 한민족 최고 조상님의 초상화가 소중하게 간직되어서 모셔져 있었다는 뜻이다. 아무튼 일제도 이제는 옛날에 속하는데 그 당시에 있었던 조상님의 초상화가 진위여부를 떠나서 지금까지 조상님이라고 간직되어서 보존해 내려왔다는 것만으로도 이 초상화는 소중하고 또한 참으로 신기할 뿐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온 구월산 삼성당 이야기

황해도 관찰사 이예가 삼성당의 사적을 기록하여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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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15권,
3년(1472 임진 / 명 성화(成化) 8년)
2월 6일(계유)
7번째기사

* 자료출처
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Tree=6&ganada=7&stype=s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이예(李芮)가 치계(馳啓)하기를,
“신이 전번의 하유(下諭)로 인하여,
문화현(文化縣)의 옛 노인 전
사직(司直) 최지(崔池)·전 전직(殿直) 최득강(崔得江)을 방문하고
삼성당(三聖堂)의 사적(事跡)을 얻어 그것을 조목으로 기록하여 아룁니다.

1.
속언(俗諺)에 전하기는 단군(檀君)이 처음 신(神)이 되어
구월산(九月山)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우(祠宇)는 패엽사(貝葉寺)의 서쪽 대증산(大甑山)의 불찰(佛刹)에 임하여 있었다가
그 뒤에 절 아래 작은 봉우리[小峯]로 옮겼고,
또 다시 소증산(小甑山)으로 옮겼다 하는데,
곧 지금의 삼성당(三聖堂)입니다.


대증산(大甑山)과 패엽사(貝葉寺) 아래의 작은 봉우리에
지금은 당기(堂基)가 없고,

따라서
그 때 치제(致祭)한 것과
또 삼성(三聖)도 아울러 제사지냈는지 그것은 알 수가 없습니다.

 


1910년대 패엽사 전경

1.
단군(檀君)과
아버지 환웅(桓雄),
할아버지 환인(桓因)을 일컬어
삼성(三聖)이라 하고

사우(祠宇)를 세워 제사를 지내다가,
제사를 폐한 뒤로부터 당우(堂宇)가 기울어져 무너졌었는데,
경태(景泰) 경오년에 이르러
현령(縣令) 신효원(申孝源)이 중창(重創)하고,
무인년에 현령(縣令) 매좌(梅佐)가 단청(丹靑)을 베풀었습니다.

1.
삼성당(三聖堂)에
환인 천왕(桓因天王)은 남향(南向)하고,
환웅 천왕(桓雄天王)은 서향(西向)하고,
단군 천왕(檀君天王)은 동향(東向)하여 다 위패가 있습니다.

속설에 전하기를,
옛날에는 모두 목상(木像)이 있었는데,
태종조(太宗朝)에 하윤(河崙)이 제사(諸祠)의 목상(木像)을 혁파할 것을 건의하여
삼성(三聖)의 목상도 또한 예(例)에 따라 파하였다 하며,
의물(儀物)의 설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1.
삼성당(三聖堂)의 서쪽 협실(夾室)에는
구월산 대왕(九月山大王)이 가운데 있고,
왼쪽에 토지 정신(土地精神)이,
오른쪽에 사직 사자(四直使者)가 있는데,
그 위판(位板)은 모두 남향하여 있습니다.

1.
예전에는 전사청(典祀廳)이 없었는데,
매좌(梅佐)가 삼성당(三聖堂) 아래에 초옥(草屋) 수칸을 지어
치도(緇徒)로 하여금 거주하게 하고,
제사 때는 여기에서 재숙(齋宿)하고 제물(祭物)도 또한 여기에서 장만하였습니다.

1.
삼성당의 서북쪽 3리(里) 쯤에 두 절이 있고,
5리 쯤에 한 절이 있고,
동북쪽 4리 쯤에 한 절이 있습니다.

1.
패엽사(貝葉寺)도 또한
삼성당 서쪽 6리 쯤에 한 고개와 한 시내를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1.
삼성당의 제기(祭器)는
옛적에는 금·은(金銀)을 사용하였는데,
왜란(倭亂) 이후 사기(沙器)를 쓰다가
매좌(梅佐)가 비로소 유기(鍮器)를 만들었습니다.

1.
묘우(廟宇)를 평양(平壤)으로 이전한 뒤로는
이 당(堂)의 제사를 폐지한 것이 벌써 60여 년이 되었다 하고,
혹은 태종조(太宗朝) 경진년 ·신사년 임오년 사이라고도 하니,
어떤 것이 옳은지 알 수 없으며,
향(香)을 내려 치제(致祭)한 의궤(儀軌)도 또한 상고할 수 없습니다.

1.
구월산(九月山) 상봉(上峯)에는 천왕당(天王堂)이 아니고
이름을 사왕봉(四王峯)이라 하며,
또한 예전에 향(香)을 내려 치제(致祭)하던 곳이 있었는데,

태종(太宗) 을미년2029) 사이에 처음 혁파하였다 하나
그 당기(堂基)를 일찍이 본 사람이 없고,
이제 또한 얼음이 얼어 위험하여 사람이 올라갈 수도 없습니다.

1.
《관서승람(關西勝覽)》에
문화현(文化縣) 고적(古跡)을 기재하기를,
‘구월산(九月山) 아래 성당리(聖堂里)에 소증산(小甑山)이 있는데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의 삼성사(三聖祠)가 있고,

구월산(九月山) 마루[頂]에는
사왕사(四王寺)가 있는데,
옛적에 성수[星宿]에 초례(醮禮)하던 곳이다.’ 하였습니다.

1.
삼성당(三聖堂)을 평양으로 옮긴 뒤로부터
비록 국가에서는 치제(致祭)하지 않았으나,
기우(祈雨)·기청(祈晴)을 할 때는 현관(縣官)이 조복(朝服)을 갖추고 친히 제사지내며,

제사에는 백병(白餠)·백반(白飯)·폐백(幣帛)·실과(實果)를 쓰고
이 밖에 다른 제사는 행할 수가 없는데,
고을의 풍속에는 영험(靈驗)이 있다고 일컬어
사람들이 감히 와서 제사하지 못합니다.

1.
기우 용단(祈雨龍壇)은 삼성당(三聖堂) 아래 백여 보에 있으나,
설치한 날짜는 알지 못하고,
현(縣)에 소장된 송(宋)나라 경덕(景德) 3년 병오년 5월

의주(儀注)에는,
‘떡[餠]·밥[飯]·술[酒]과 흰 거위[白鵝]를 사용하여 제사를 행했다.’고 기재되었으나,
지금은 흰 닭[白雞]을 대신 쓰고 돼지는 쓰지 않습니다.

1.
삼성당(三聖堂) 아래 근처에는 인가가 조밀(稠密)하였는데,
제사를 파한 뒤로부터 악병(惡病)이 발생하기 시작하여 인가가 텅 비었습니다.
그러나 닭·돼지를 도살하여 신령이 싫어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하니,

예조(禮曹)에서 이것을 근거하여 아뢰기를,

“백성이 모두 삼성당(三聖堂)을 평양부(平壤府)에 옮기고
치제(致祭)하지 않자 그 뒤로부터 악병이 일어났다고 하니,

이는 비록 괴탄(怪誕) 무계(無稽)한 말이나,
그러나 옛 기록에,
‘단군(檀君)이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화하여 신이 되었다.’ 하였고,
지금 본도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에 그 묘당(廟堂)이 있으며,

또 전에는 향(香)을 내려 치제하였으니,
청컨대 백성의 원하는 바에 따라
평양의 단군묘(檀君廟)의 예(例)에 의하여
해마다 봄·가을로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 제사를 행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4책 15권 10장 B면
【영인본】 8책 63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