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극의 개념
무극의 개념
무극(無極)은 극이 없다는 뜻입니다. ‘極’이란 무엇인가? ‘극’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극이에요. 이런(무언가를 가리키며) 뾰족한 걸 극이라고 얘기합니다. 지구에도 남극이 있고 북극이 있듯이 꼭지점 같은 것을 ‘극’이라고 얘기해요. 따라서 ‘무극(無極)’이라면 극이 없다는 뜻이고 ‘태극(太極)’이라는 것은 가장 큰 극이라는 뜻입니다. ‘극(極)’에는 그런 뜻도 있고 ‘中心’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원래 집을 지을 때 맨 위에 용마루를 얹는데 이걸 극이라고 얘기해요. 옥척(屋脊)이죠. 극엔 그런 뜻도 있다는 거, 그러니까 중심의 뜻도 들어 있어요. 중심 가운데라는 뜻이 들어 있어요.
극의 뜻이 옥편(玉篇)을 찾아도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제가 여러 가지를 찾다가, ‘무극(無極)’의 경우 그 ‘극’의 개념은 남극과 북극할 때 끝의 개념과 저런 중심의 개념 두 가지가 좋지 않겠느냐고 생각해 봤어요. 중심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기 때문에―. 무극이라는 것은 그래서 ‘아직 중심이 없다’ ‘변화의 중심이 없다’ ‘변화 자체가 성립하고 있지 않다’는 뜻인데 그러면 왜 우리가 무극을 알아야 되느냐 하면…
상제님께서 ?도전? 2편 20장에서
“이제 말세의 개벽세상을 당하여 앞으로 무극대운(無極大運)이 열리나니…”
증산도는 무극대도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증산도를 한 마디로 얘기하라 하면 “무극대도(無極大道)다” 이렇게 얘기해요. 그러니까 무극의 뜻을 알지 못하면 증산도를 영원히 몰라요. 그리고 동학(東學)에서 최수운(崔水雲) 대신사(大神師)가 “어화 세상 사람들아 무극지운(無極之運) 닥친 줄을 너희 어찌 알까보냐 무극대도 닦아내니 오만년지운수(五萬年之運數)로다...” 자, 무극대도가 나온다 그랬어요. 동학하는 사람들은 동학이 무극대도라고 그래요. 그러나 동학은 무극대도가 아니에요. 동학은 증산도의 예고편인데, 무극의 뜻도 모르면서 무극대도다 하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무극대도가 앞으로 나온다 무극대도가... 그건 증산도가 나온다 그런 뜻이에요.
?도덕경(道德經)?에 “유생어무”(有生於無)라는 말이 있어요. “유(有)라는 것은 무(無)에서 생겼다”는 뜻인데, 이때의 무(無)가 무극(無極) 개념입니다. 따라서 현실세계로 질서화되기 이전 자리, 현실을 창조한 생명의 본원자리, 그게 무극자리예요. 그러니까 이 현상세계를 용(用)이라고 얘기할 때 이 현상세계를 창조한 본원자리를 체(體)라고 얘기할 수 있는데, 그 자리가 무극(無極)자리예요. 현실세계는 태극(太極)자리예요. 무극의 用이 태극이고요, 태극의 體가 무극이 되요. 그래서 태극을 그릴 때 이렇게(?) 그리고 무극은 이렇게(◯) 그려요. 그러니까 태극 속에 무극이 포함되어 있어요. 이 정도는 여러분들도 개념잡을 수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질서화되기 이전 자리다’ ‘만물을 창조한 본원자리다’ ‘현실세계를 창조한 어머니자리다’ ‘체가 되는 자리다’ ‘태극의 체가 되는 자리다’ ‘조화의 근원자리다’ ‘질서화되기 이전 자리다’.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극이 없는―극은 치우침의 뜻도 있으니까요, 치우치지 않은 그러한 세계, 음양으로 나뉘어지기 이전 자리, 현상계가 생겨나기 이전 자리를 무극으로 얘기합니다.
무극의 두 가지 개념 ― 영(0)무극과 십(10)무극
그런데 그 때의 무극을 우리는 ‘영(0)무극’이라고 해요. 현실적으로 ‘영’이라는 것은 ‘1+0’도 1, ‘2+0’도 2, ‘100+0’은 100. 전부 0이라는 것을 깔고 있어요. 현실세계를 창조한 무극을 얘기할 때는 ‘0 무극’이다 이거예요. 그런데 증산 상제님께서 앞으로 말세의 개벽세상을 당하여 무극대운이 열린다고 그랬어요. 그러면 이 무극대운은 현실 속에서 열리는 것이기 때문에 질서화되기 이전의 무극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란 말예요. 이게 또 엄청난 자리죠. 현실 속에서의 무극이 있다 이거예요. 木․火․金․水를 일수(一水)․이화(二火)․삼목(三木)․사금(四金)이라고 얘기하는데, 일․이․삼․사를 전부 더하면 십(十)이 됩니다. 현실세계가 돌아가면서 토(土)가 생긴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제가 ‘土라는 것이 참 알기가 어렵다. 토라는 것은 현실의 바탕도 되면서, 현실이 돌아가면서 스스로의 조화력, 조정력으로 생기는 것이 토고 이것이 현실세계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이 된다’ 그랬어요.
예를 들어 우리 한민족이 몇 천년 동안 역사가 흘러오다 보니까 한(恨)에 대한 집단의식도 생기게 되고 그것이 우리 민족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어요. 역사가 흐르는 과정 속에서 ‘한’이라는 정서가 우리 민족을 움직여 가는 원동력이 되는데 그게 ‘土’ 자리란 말이에요. 현실이 돌아가면서 생기는 무극인 십무극(十無極)도 그와 같은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하도, 낙서 얘기도 하고, 우주생명의 순환도 얘기해야 되요. 이렇게 현실이 돌아갈 때 이 木․火의 양의 과정을 리드하는 것이 ‘五土’예요. 그리고 金․水의 전 과정을 리드하는 건 ‘十土’자립니다. 그래서 앞으로 무극대운이 열린다 하면, 후천 오만 년의 十土가 주재하는 세상이 열린다 이런 뜻이에요. 이것은 현실의 역사 속에서 십토의 세상이 열린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무극에는 현실의 질서세계를 창조한 근원자리로서의 무극이 있고요, 또 현실세계가 질서화되어서 돌아가는 과정 속에서 창조의 이상을 실현하는 십무극이 있어요. 그리고 앞의 무극은 0無極이고 우주의 여름가을이 바뀔 때 작용하는 土의 조화기운을 十無極이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기독교의 십자가와 불교의 만자(卍字)도 십무극의 세상을 지향하고 있다
무극의 세계는 생명의 본원자리예요.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십자가에 못이 박히는데 십자가라는 것이 십무극 세계를 상징하고 있는 거예요. 불교에서도 사실은 ‘만(卍)’ 자가 있는데 이것도 십무극 세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가야 할 이상세계는 십무극의 세계인데 아직 이 세계가 이루어지지 않았죠. 그래서 꾸부러져 있는 거예요. 아직 선천세계는 십무극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과정의 세계입니다.
기독교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십무극을 지향한 7의 종교’라고 할 수 있어요. 10을 지향한 7의 종교라고 얘기해요. 기독교는 불(火)의 종교입니다. ‘十’을 지향한 지금의 기독교는 철저하게 7이라는 숫자로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최초로 세운 교회가 일곱 교회죠.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우주를 창조할 때에 ‘seven spirits of god’, 하느님의 일곱 성령(七聖靈)이 나오죠. 그런데 창조의 일곱 성령은 개벽할 때도 나타나요. 「요한계시록」에 나오거든요. 그런데 은(殷)나라 시대의 갑골문자(甲骨文字)에서는 ‘十’자가 ‘七’字예요. 자, 어쨌든 이 무극에 대해서 두 가지 개념이 있다 하는 것을 여러분한테 말씀을 드렸습니다.
무극설의 단초를 연 주렴계(周濂溪)
그 다음에 이 ‘무극(無極)’에 대해서 최초로 이야기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주렴계(周濂溪)라는 사람입니다.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의 스승으로서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짓고 ?통서(通書)?를 쓴 송나라 초기의 성리학자였던 주돈이(周敦頤)의 자(字)는 무숙(茂叔)이죠 주무숙(周茂叔). 이 양반이 ?태극도설?을 썼는데 “無極而太極”이라는 말을 했어요. ‘而’자에는 ‘계승’의 뜻이 있어요. 무극에서 태극으로 ‘動’하게 된다는 뜻이 있어요. 또 그 뒤에 보면 “太極本無極也”라는 말이 있어요. ?태극도설?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태극은 무극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겁니다. 이렇게 해서 주렴계가 ?태극도설?에서 ‘무극’이라는 용어를 최초로 쓴 사람입니다.